신의 별 '별의 기억'






사람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풍화로 인해 내가 알던 공간이 무너지고 부스러지는 것처럼, 기억 또한 삶의 물리 작용을 통해 닳고 으스러진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풍경은 대체로 블러 처리를 하거나 비닐 봉투를 씌운 것처럼 뿌옇게 재생된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몇몇 순간이 있지만, 추억이 거주하는 대부분의 공간에는 이미 비닐 봉투가 겹겹이 쌓여있다. 


기억이 만들어낸 풍경을 선명하게 보고 싶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대체로 정확히 기억했지만,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흐려진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희뿌연 형상을 만들었다. 여전히, 기억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 나타낸 형상들은 내게 알 수 없는 안도감을 주었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았어.” 

“별아, 우리는 여기 있어.” 


아무 말도 없는 픽셀들이 그렇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닳고 깨진 그래픽 속에서 정확한 기억을 마주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의 파편이 모인 곳에 내가 존재했다. 걷어내고 싶은 악몽도 영원히 머물고 싶은 행복도 깨진 그래픽처럼 내 곁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름 모를 당신에게, 비록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당신이 보고 싶은 기억의 이미지가 이미 당신 몸에 내재돼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전하고자 한다. 비록 흐릿한 잔상이더라도. 이 사실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 초상 6. 대야 >


안녕, 내 이름은 별이야. 신이 별이지만 별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내겐 아주 소중한 이름이거든. 태어나기 전부터 간직하고 있던 아주 소중한 이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나는 대야에서 태어났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처음 눈을 떴을 때 이미 빨간 고무 대야 안에 있었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로 나를 씻겨주는 할머니랑 엄마를 쳐다봤어. 기억 속의 엄마랑 할머니는 달걀귀신처럼 흐려져 있지만, 누가 할머니인지 엄마인지는 말할 수 있어. 

물속은 따뜻하고 아늑했어.

  



< 기억 23. 엄마 >


엄마는 일을 해야만 했어. 일해야 하는 건 아빠도 마찬가지였지만, 스물다섯이라는 나이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이름을 감당하기 너무 어려운 나이였어. 순식간에 벼랑 끝에 내몰린 엄마를 지키려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를 데려갔어.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너무 사랑했어. 하지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 아빠도 정말 보고 싶었지만, 눈을 감았을 때 선명하게 떠오르는 사람은 엄마니까. 엄마의 목소리를 매일 듣고 싶었어. 9 1 … 0 3 … 6 … 어떤 걸 순서대로 눌러야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를 외웠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었어. 새벽에도 엄마는 내 전화를 받았어. “엄마, 우리 언제 봐?” “백 밤만 더 자면 볼 수 있어.” 나는 할머니의 허리를 주무르면서 백을 배웠어.

  



< 기억 28. TV >


학교에서 자기장을 배웠어. 자석끼리 밀어내거나 잡아당기는 힘. 금속을 잡아당기는 힘. 어린 나에게 TV는 커다란 고철 더미였어. 나는 TV에 자석을 들이밀었어. 당연히 붙을 줄 알았는데 액정에 부딪힌 막대자석이 카랑- 하고 울렸어. 왜 안 붙을까 고민할 새도 없이 화면 색깔이 바뀌는 걸 보았어. 신기하다. 재밌다. 몇 번이고 TV에 자석을 들이밀었어. 한참을 놀다 자석을 치웠을 때 TV의 색깔은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황급히 TV를 끄고 자석을 숨겼어. 밖에서 돌아온 할아버지가 나에게 물었어. 


“TV 색깔이 갑자기 왜 이런 거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우유를 마셨어.




< 기억 30. 잉태 >


동생이 생겼어.

 

나는 엄마랑 아빠를 만나는데 7년을 기다렸는데. 동생은 바로 함께 살 수 있다는 게 부러웠어. 엄마랑 아빠를 빼앗기는 것 같았어. 엄마랑 아빠가 나를 버릴 것 같았어. 엄마랑 아빠가 내가 필요 없다고 할 것 같았어. 다시는 못 볼 것 같았어. 그런데,


태어난 동생이 너무 예뻐서 미웠어. 이 기억만은 선명할 정도로.




< 기억 14. 학교 >


학교가 싫었어. 급식을 남기면 담임선생님이 집에 갈 때까지 식판을 들고 서 있게 했어. 싸움을 잘하는 애들이 나를 때렸어. 의자를 던지고 싶었어. 하지만 조용히 제티를 사 갔어. 우유 급식에 제티를 타주면 때리지 않았어. 어쩔 때는 문화상품권을 사 가야만 했어. 그러면 애들이 좋은 친구라고 말해줬어. 나는 좋은 친구가 되기 싫었어. 

“엄마.”

“응?”

“내가 학교에서 제일 멋있는 것 같아!”


거짓말해서 미안해, 엄마.




< 기억 20. 사랑이 >


사랑이는 하얀 똥강아지. 대전 이모할머니 집에서 사랑이를 데려왔어. 사랑이는 대전에서부터 나를 졸졸 따라다녔어. 사랑을 많이 주려고 사랑이라고 이름을 지었어. 폭풍우 치는 날에, 사랑이는 내가 베란다에 심어둔 해바라기를 모두 뜯어먹었어. 나는 사랑이한테 계속 소리를 질렀어.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어. 너 같은 건 없어도 된다고 말했어. 사랑이는 짖지도 않고 몸을 움츠렸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됐어. 사랑이는 고모네 집에 가게 됐어. 사랑이가 아니라 삼동이가 됐어. 심보가 못돼서 벌 받은 거라고 생각했어. 나 때문에 할머니가 아프고 사랑이가 떠났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막내가 태어났어.

둘째와 함께 외딴 섬에 온 기분이 들었어.




< 기억 0. >


어떤 기억은 아무리 복원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아.

흐릿하게도 보이지 않아.

떠올리지 못하는 걸까 거부하는 걸까.

잘 모르겠어.




< 초상 15. 천재 >


천재가 되고 싶었어. 

예술을 하면 천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특별해지고 싶었어. 유명해지고 싶었어. 대단한 작품을 남기고 싶었어.


사실 사랑받고 싶었어.

예술을 하게 된 건 별다른 이유가 없었어.




< 초상 11. 연인 >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이전에도 사랑했던 사람은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우리는 서툴렀고 불안정했어. 서로 계속 불태우다 끝내 스스로 장작이 되고 말았어. 


위태로운 불씨는 끌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되었어. 가끔 비가 내릴 때 그 사람을 생각해. 흐릿하게 떠오르는 얼굴을 바라봐. 안녕, 잘 지내니? 안녕. 안녕. 안녕…

 



< 초상 3. >


시간이 쌓일수록 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나.

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기억하고 있는 얼굴들이 번져가.

뿌옇게, 아주 뿌옇게.




< 기억 0-2. 흔들의자 >


2016. 10. 22

할머니가 떠났어.


알바를 하는 날이었어. 퇴근하자마자 새 옷을 사려고 명동 에잇세컨즈에 들어갔어.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 옷 사고 전화를 하겠다고 했는데 할머니가 돌아갔다는 거야.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벌써 퇴원하셨어? 엄마 목소리가 떨렸어. 엄마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어.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택시를 탔어. 무작정 달렸어. 달렸어. 달리고, 달리고 달렸어. 할머니가 보였어. 할머니 나 왔어. 할머니 나 왔어. 할머니가 너무 차가웠어. 


“왜 아무도 나한테 이렇게 될 때까지 안 말해준 거야!”


나는 너무 비겁해서 가족들에게 버럭 화를 내버렸어. 할머니의 눈을 피했던 건 나였으면서. 




< 기억 15-2. Non-binary >


내가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먼 귀퉁이에서 와작하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어. 콰차창도 쨍그랑도 우당탕도 뿌직도 아닌 와작. 와작. 와작.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들이 다르게 느껴졌어. 지금까지 헤매온 나를 만났다는 게 너무 기뻤고, 동시에 내가 솔직해질수록 나를 대하는 시선이 안 좋아지는 걸 느꼈어. 사람들이 흘겨보는 시선도, 화장실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것도 두려웠어. 누군가 나를 멋대로 만지고 지나갈 때도 있었어. 그래도 내 안의 나를 보고 있으면 안락한 기분이 들었어. 같이 무너져 내리자. 와작, 하고 으스러지더라도, 남아있는 기억이 모두 흐려지더라도. 


내가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저주이면서 동시에 축복이었어.

평생 저주받더라도 놓고 싶지 않은 구원이었어.




< 기억 22. 해바라기 >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해바라기. 집을 뛰쳐나온 후에 엄마를 잊고 싶지 않아서 팔에 문신을 새겼어. 사랑이를 떠올렸던 것 같기도 해. 아무튼. 할머니도,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도 점차 흐려지는데 엄마를 잊기 싫어서. 엄마랑 싸우고 엄마가 미워하는 일이 생겨도 엄마는 잊을 수 없어서. 그래서 해바라기를 심었어.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을. 엄마가 이 세상에서 떠나가도 언제든 보러 올 수 있도록.




< 기억 18. >


보고 싶은 사람은 점점 많아지는데 왜 기억은 흐려지는 걸까. 어떻게 하면 만나지 않아도, 사진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까. 먹에 담긴 검정처럼 내 몸에 짙게 물든 사람마저 뿌옇게 변해가는 걸 보면 몸서리치게 두려웠어. 그래도 거기 있는 거지? 나를 떠나지 않을 거지? 떠나간다 해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잔상을 매만지고 있을 거야. 




< 초상 2. 꿈을 꾸는 사람 > 


악몽도 길몽도 모두 꿈이니까, 언제든 나를 찾아와줘. 선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꿈을 꾸는 동안 너희를 놓지 않을 거야. 무서운 기억이 찾아오면 소리를 지를지도 몰라. 슬픈 기억이 찾아오면 눈이 탱탱 붓겠지? 자지러지게 웃긴 기억이 찾아오면 하루가 행복해질 거야. 때때로 그 순간이 그리워서 괴롭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나는 너희를 기억하고 싶어. 평생을 앓고 싶어. 그럴 수 없다 해도 발버둥 치고 싶어.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하지 못한 이야기도 말할 수 없던 이야기도 너무 많았지만,

언젠가 희뿌옇게 가려진 기억들을 꺼내서 새로 보여줄게.


너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네가 되찾고 싶은 기억들은 네 안에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그게 어쩌면 너에게 끔찍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너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 


안녕,

내 이름은 별이야.

반짝반짝 빛나는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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